나의 이력서
남한산성
개원사 김 호봉
1. 돌이켜보건데 본인은 반만년 역사에 두번 다시 있어서는 안될 민족적 치욕이며 오점을 남긴 일제 연호 메이지44년(서기 1911년) 가난한 농부의 가정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려서는 지개를 지고 노동밖에 모르고 자랐으나 차차 철이 들면서 우리 민족이 일본의 노예 생활을 한다는 것을 알게되었다.
2. 나는 이 사실을 알게 되자 분통이 터졌으나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나는 일본인들이 살고 있는 부락이 멀지 않은 곳에 살아서 그들과 접촉이 잦았으나 증오심이 강하여 그들을 만나기 싫어했고, 더욱이 그들의 언어와 생활풍속은 추호도 본받지 않했고, 또한 한 마디도 그들을 찬양해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그들은 화목하고 근검하며 애국애족하여 맡은 바 직책에 충실하였다.
3. 그러나 우리 일부 몰지각한 유생들은 국왕과 국모를 적의 손에 참살당하고 국토와 민족 전체를 송두리째 적에게 빼앗기고도 아무 반성이 없이 조상적부터 물려받은 계급만 따져 서로 반목하고 모략과 중상, 시기와 질투 방일과 낭비로 허탈감에 젖어 있으나 이들을 지도할만한 기관이 서 있지 않으니 우리들의 생활은 실로 비참하기 짝이 없었다. 하늘을 나를듯한 일본인들도 망할 때가 왔는지
4. 세계를 삼킬듯이 날뛰다가 1945년 8월 15일 우리는 그들의 굴레에서 해방을 맞은 것이다. 나는 그동안 그들의 징용을 피하여 도망다니다가 불가에 몸을 담았었다. 꿈에도 그립던 태극기의 물결과 함께 대한독립만세의 함성이 천지를 진동하였다. 그러나 해방의 기쁨이 채 가시기도 전에 민족의 비극은 또 다시 이 땅에 찾어온 것이다. 삼천리 금수강산에 38선이란 괴상한 이름이 생겨 국토가 양단되고 민족이 남북으로 갈라서고 말았다.
5. 아- 참으로 슬픈 일이다. 왜 우리는 이런 고난을 또 다시 겪어야만 하는가? 36년이나 왜왕 슬하에서 굶주리고 헐벗은 우리 국토와 민족이다. 집안 싸움으로 또 국토가 두동강이가 나다니 땅을 치고 통곡을 하여도 시원치 않다. 1950년 6월 25일 저 붉은 마수들은 대거 남침을 시도해온 것이다.
6. 나에게는 1924년생 아우가 한 사람 있었다. 그의 이름은 김성원이었다. 6세 때 모친을 사별하고 홀로 계시는 부친 슬하에0 가족이 이산하고 타향에서 타향으로 이러 저리 옮겨다니며 스라린 고통 속에 온갖 풍상을 다 겪으며 자라났다. 비록 공식적인 수학은 없었으나 야간 면학으로 국문 해석은 물론 동몽선습과 명심보감 등 약간의 한문도 숙습하였고, 단종애사와 임진록 성웅 이순신 등의 역사와 충효록을 숙독하였다.
7. 그는 머리가 총명하여 한번 들은 말은 잊지 않았고, 마음이 온순하여 어른을 공경하고 이웃을 사랑하며 약자를 도와주고 어리석은 이를 용서하는 정직한 청년이며, 씩씩한 장부였다. 일제의 징병을 피해 도망치다가 그들에게 붙들려서 옥중에서 해방을 맞았다.1949년 6월 어느 날 나주 다보사(多寶寺)로 큰 형인 나를 찾아왔다.
8. 나는 반가이 맞아 그동안 아버지 안후를 위시하여 가정 형편과 국가 대세를 문답하였다 아우는 정색을 하고 : 형님 지금 현황으로는 집에만 있을 수 없습니다. 공산도당들이 날마다 찾어와서 괴롭히니 자칫 잘모사면 생명도 위험하옵고, 뿐만 아니라 새로 탄생한 우리 국각와 민족이 위기에 처해 있는 이 때에 그냥 보고만 있을 수 없습니다. 형님 저는 응모병으로 입대하려고 합니다.
9. 허락해주십시오. 그는 말을 마치고 다시 일어나 절을 하였다. 그는 참으로 정중하고 씩씩한 표정이었다. 나는 반갑게 그의 손을 잡고 흔들며 : 참 고맙다 참으로 잘 생각하였다. 우리 국가 간성이되어야 한다. 암 그렇고말고, 나는 재삼 그를 찬양하였다. 그리고 신라 "때 원광법사의 화랑오계를 일러주고 매사에 주의할 것을 부탁하였다. 그리고 아버님께 말씀드리면 반대할 것을 염려하여 그냥 갈 것과 편지 자주 하라고 말하였다.
10. 아우는 그 길로 주소지인 영산포 읍사무소에 임시 호적을 붙이고(호적은 본군 다도면에 있음) 00 부대에 응모병으로 입대하여 경기도 부천에서 복무하다가 얼마 후 휴가라고 한번 다녀갈 때에 부대 이름과 군번을 알려주었지만 모두 잊어버린 것이다. 아우가 입대한지 꼭 1년만에 6.25가 발발한 것이다.
11. 적색분자들은 세상을 만나듯이 좋다고 춤을 추지만 우리 국민 전체가 놀라지 않으며, 떨지 않으리요마는 그중에서도 우리 아버지께서는 완전히 암흑 세계가 온 것이다. 어'찌할 바를 모르시다가 정신을 수습하여 장자인 나에게 오신 것이다(그 동안은 아버지는 서모와 동거하시고 계셨다) 멀고 험한 길을 80여리나 도보로 걸어오시어 피곤도 하시겠지만 식사를 드시지 못하고 자리에 누은 채 기동을 못하시었다.
12. 나는 그동안 전남 장성군 동화면 송계리 촌후 산간에 한간 초가를 짓고 수도에0 전념하고 있었다. 아버지께서는 63세에 아직 정정하신데도 그의 둘째 아들 성원이를 지극히 사랑하신터라 매일 매일 그의 이름을 입이 달토록 부르시며 모부림치시다가 만 6개월이나 되는 기나긴 시일을 고통하시다가 금년 12월16일에 영원히 못 오실 길을 가신 것이다. 나는 두 눈이 캄캄하였다. 그 중에서도 폭설과 안개로 천지를 분간할 길이 없었다.
13. 뿐만 아니라 여기는 아직도 군경의 발길이 이르지 못한 채 사방에서 총소리가 천지를 뒤흔들고 사람들의 아두성이 바람결에 들려오 건마은 우리 초상 집에는 초상에 도와줄 사람을 만나볼 도리가 없으니 애닳은 일이 아닐 수 없다 나는 생각다못하여 낫을 찾어가지고 부락으로 내려가 대나무 몇개를 베여다가 발을 만들어 눈을 헤치고 당일 석양에 아버지를 매장하였다. 참으로 슬픈 일이다.
14. 19세 때에 35세이신 젊은 모친을 사별하고 홀로 계시는 부친을 모시고 집을 버리고 객지로 타향으로 어린 동생들과 갖은 고난을 다 겪으며, 산전수전의 세월을 보내면서 대소사를 의논해오다가 아버지는 서모와 동거하시고, 동생 성원은 결혼하였다가 응모병이 되어 생사를 모른채 천애고아가 된 것이다. 사람이라고는 학생 한 사람과 공양주(식모) 그리고 나 3인이 출상한 것이다.
15. 아버지는 직접 내 손으로 매장하였으나 우리 군인 동생은 지금까지 생사를 모른채 살아온 것이다. 독자 여러분 필자는 그동안 빨갱이들과 어떻게 살어왔을까 궁금하시겠지요? 그들의 세상에서 살아나온 것을 대강 기록하여 여러분의 궁금증을 풀어드릴까 합니다. 우리 집에 군인이 한번 다녀간 후 그들은 나를 군인 가족으로 지목하고 죽이려고 여러 차례 회의도 열고 어러 차례 잦어와 심사하였다.
11. 그들은 우리 집 가산을 몰수하기로 음력 8월15일날 부랑청년 몇명이 총칼을 들고 우리 집에 나타났다. 우리 풍속에 추석 명일이기도 하지만 나는 설마 (그들의 선전에 따르면 대한민국이란 완전히 없어지고 일본으로 도망갔다는 것이다) 우리나라가 그처럼 허무하게 없어졌을까 의심하면서도 우리 나라가 다시 복구할 것과 우리 군인 동생이 무사히 귀가할 것과 우리 아버지 병환이 쾌차할 것을 불전에[ 기도드리며
17. 더욱 이 날은 우리 군인 동생의 생일날인지라 여러 가지로 착잡한 마음을 달래고 있는데 밖에서 사람의 기척이 있어 나는 일어나 문을 열었다. 빨갱이 세상이 되면서부터 사람을 대하면 무조건 무섭기만 하고 저 사람이 나를 죽이려오지나 않했나 겁에 질린 얼굴로 처다보는 것이다. 그들 5, 6명의 부랑 청년들은 독살스런 얼굴로 험상굿은 눈알을 부라리며
18. "아- 이 대사님이 우리들이 어서 죽으라는 기도를 드리고 있으시군"하면서 신발을 신은채 총칼을 들고 법당(불전)에 들어선다. 나는 천년스럽게 일어나 그들을 맞으며 "어서 오십시오. 우리 공화국이 잘 되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동무들도 부처님께 절 좀하십시오. 오늘이 마침 추석 명일 좋은 날 잘 오셨습니다" 하면서 반기는 체 하였다. 그들은 이런 말이 그들 귀에 들어갈리가 없다.
19. " 이 쌍간나이 새끼 이 따위 소리가 어디 있어. 이 반동 새깨 네 군인 가족이지!! " "거 무슨 말씀입니까? 우리 집에는 군인갈 사람이 없습니다. 어디서 잘못 듣고 오신 것 같습니다!! "이 중놈의 자식이 솔직하지 못하고 거짓뿔로 속이려들어. 우리가 속을 것 같으나?" 그들은 발길로 차고 총대로 후려갈기는 것이다 : 목습이 아깝거든 바른 말해. 네 동생이 군인이라지" 나는 정색을 하면서 :"말씀을 좀 삼가시오
20. 그게 무슨 말 버릇이요. 그리고 우리 집에 군인간 동생이 있다는 말씀은 누구에게 들으셨오? 잘못 들은 것이오. 그들은 나의 태도에 감탄하였는지 좀 누그러지 말투로 "군인 동생이 다녀갔다는 말을 분명히 듣고 왔는데, 바른 말 못하겠어" 나는 이제야 생각난다는 듯이 "아 언젠가 한 1년 전인가, 군복 차림을 한 청년 한 사람이 길을 잃고 헤매다가 들어와 쉬어간 일이 있지요. 그러나 그 동무도 그의 말을 들어보니 아군이던데요.
21. 나는 전쩍으로 부인하였다. 그들은 내 말을 들은채도 하지 않고, 다짜고짜로 가산을 뭉처 나보고 지고 가자는 것이다. 나는 기가 막히나 하는 수 없다. 그들은 욕설을 계속 퍼부으며 물 한 모금 마시지 못하게 한다. 나는 배도 고프지마는 목이 말라 죽을 지경이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시키는대로 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나에게 짐을 지어보내고 딴 길로 간 모양이다.
22. 나는 그들이 뒤에 오는 줄만 알고 짐을 지고 가는데 어느 부락 앞을 지나게 되었다. 부락 앞에서 놀든 어린 아이들이 나를 보고 우루루 몰려나와 앞 길을 가로 막으며 "동무 어데 살며 어데 갑니까?" 나는 짐을 부려놓고 숨을 들이며 뒤를 돌아보았으나 그들의 종적은 모연하였다. 나는 소녀들을 바라보며 안타까운 생각이 들지마는 그들은 뽐내며 말을 걸어온다.
23. 동무 빨리 말하오. 우리들이 우리 마음대로 하는게 아니라 분주소(파출소)에서 시키는대로 우리는 할 뿐이요. 어서 대시오" 나는 하는 수 없이 처음부터 자초지종을 자세히 말하였다. 그들 말대로 소년 동무들은 이것을 종이에 기록하며 몸 수색까지 하여 만년필과 주머니칼 등 쓸만한 소지품을 빼앗아간다. 그들이 말하는 분주소까지 가는 도중에ㅐ는 10여 부락이 있는데 가는 곳마다 이와 같이 되풀이하는 것이다.
24. 해가 넘어가고 땅거미가 필 무렵에 목적지에 당도하였다. 이 날은 8월 한가위 우리들의 명일건만 그들은 소위 반동분자들을 잡아다가 갖은 고문을 가하는가 하면 가산 집물을 몰수해다가 저기저기 훑어져 있다. 그들은 잠을 못잔 탓도 있지만 두 눈이 뒤집혀 보기 흉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며 나무아미타불 관셈보살 지장보살 혹자는 흥 대사님이로군. 이 대사 동무 어서 오십시오" 하면서 비웃는 것이다,.
25. 나는 못들은채하고 그의 상관인듯한 사람에게 손을 내밀며 "얼마나 수고가 많으십니까? 진작 와서 인사하였어야 할텐데 이제 와서 미안합니다. 그는 고맙다고 답례하고 여기 온 이유를 물어본다. 나는 대강 이야기를 하였더니 그는 난색을 보이며 그 동무들이 와야 하겠으니 기다리라고 한다. 나는 기다릴 수박에 하는 수 없었다. 배는 고파 등에 붙고, 먼 길에 짐을 지고 와서 몹시 피곤하여 조름이 쏟아진다.
25-2. 그러나 앉을 곳도 없는데 누을 곳이 있겠는가? 그들은 밖에 나가 기디리라 하고 안에서는 다시 고문을 시작하는 것이다. 죄 아닌 죄로 비명 소리는 원근에 사무치는 것이다. 나는 나의 몰골을 내려다볼 때 참으로 가소로운 일어었다. 온 몸에 먼지와 땀이 흠뻑 배어 후줄근한 처지에 온종일 굶고 길을 걸어왔으니 그 몰골이 어떠하랴? 우리 절에 왔든 졸개들이 들이닥치자 나를 잡아꿀이고
26. 폭언을 내뱉는다. 나는 그들이 시키는대로 꿇어앉았다. " 이봐 동무 동무 동생 한 사람이 군인이라지? 솔직히 말하면 우리가 다 알아서봐줄 수 있어. 솔직이 말해보라우 . 동생 이름이 무어지? 나는 절대로 동생이 없다고 했다. 그들은 매 발톱처럼 징그러운 손으로 내 등을 툭툭 치며 "우리가 다 알고 있어. 알고 묻는데 솔직하게 고백하면 봐줄 수 있지만 그렇지 못할 땐 없어.
27. 어서 말해보라우! 나는 들은 채도 않고 그냥 앉아 있었다. 그들은 나를 물끄럼히 내려다 보다가 " 요 쌍간나이 새끼 악질분자로군그래 말 못하겠어. 좀 좀 보아야겠어. 구드 신은 발길로 사정 없이 걷어찬다. 꺼꾸러지면 다시 얼으켜차다가 지치면 몸둥이로 후려갈리다가 제 풀에 지처 숨을 돌리며 "이래도 말 못하겠어. 아직도 좀 모자란게로군 그들은 주전자에 물을 담아
28. 고추가루 세례 등 온갖 악해을 밤이 새도록 되풀이하였다. 나는 죽은 시체처럼 땅바닥에 쓰러져 있는데 그들도 피곤한지 이데로 사라졌다. 나는 쓰러진채로 잠이 든 것이다. 어느 때나 되었는지 발로 툭툭 하는 바람에 눈을 떠보니 먹을 것을 가지고 왔다. 좀 부드러운 말씨로 "정신 차려 이것을 좀 먹고 우리 공화국을 좀 도와주오. 동무 동생도 군대에 가고 싶어 갔겠오. 그 개새깨들한테 끌려갔겠지. 안그렇수 동무.
29. 그만에 맘 돌려 바로 고백하고 우리를 도와주면 우리가 잘 봐준다 그말이오. 그들은 감언이설로 꼬우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들은 채도 하지 않고 먼 산만 바라보았다. 그들은 여러 가지로 달리기도 하고 욕설을 퍼붓기도 하면서 고문이 계속되어 3박4일이 되는 날 내가 사는 부락 사람이 찾아와서 무엇이라고 하였는지 석방이 되어 그의 등에 엎혀나왔다.
30. 나는 죽을려고 몇번이고 생각해보았으나 병환으로 누워계시는 아버지를 생각하면 차마 죽을 수가 없었다. 집에 돌아온 나는 1개월이 넘도록 몸에 자유가 없엇다. 이 밖에도 아슬아슬한 일이 한이 없지만 몇가지만 소개하려 한다. 우리가 사는 부락에 그들의 소위 애국자라고 하는 여성 동무가 살고 있었다. 그는 빨지산(특수 빨갱이)의 아내로 그의 남편이 산으로 숨어다니며 아군과 전투하다가 죽은 것이다.
31. 그들의 셰상이 되니 그는 날뛰기 시작한 것이다. 젖먹이 어린 애를 홀로 계시는 시아버지에게 맡기고 아홉 가지나 되는 복잡한 벼슬을 도맡어 기세가 이만저만 당당한 것이 아니다. 그녀는 언젠가 나를 찾어왔다. 나는 이 충신 여성 동무를 전부터 잘 알고 있었다. "스님 안녕하십니까? " "예 여동무 어서 오십시오. 얼마나 수고가 많으십니까:? ""내야 별로 하는 게 있어야지요"
32. 우리 여성 동무가 일이 바쁘실터인데 어떻게 이렇게 오셨습니까?(그는 나의 마음을 떠보려고 온 것이 틀림 없었다) "우리들이 원하는 세상이 되어 모두 좋아서 날뛰고 있는데 스님의 생활은 어떠하시오. 좀 나오셔서 일하고 싶지 않으시오? 그는 내가 홀로 살고 잇는 것을 기회로 연정을 느끼는 눈초리로 나를 흘겨보며 나의 대답을 기다린다.
33. "나는 웨 동무 자격이 없습니까? 그 시시꽝스러운 스님 칭호 그만두겠습니다. 그 순경들 까부는 것을 볼 때마다 층 너희들이 지금은 까분다마는 38선만 터져보라. 쥐구멍 참 할 것이다라고 하였지요"나는 아주 정다운채 웃어보였다. 이 여성 동무 손뼉을 치며 깔깔거리면서 다자고짜로 내 손을 잡는다. "우리 스님 동무 참으로 고맙습니다. 우리 당원에 가입하셔야겠습니다. 나는 크게 놀라며 나의 말이 지나친 것을 후회하였다.
34. 그러나 얼굴에 조금도 난색을 표명하지 않고 천연스럽게 :"이 외딴 집에 아버지가 병환으로 위중하시니 아직은 어찌하지 못하오. 우리 인민이 뉘가 당원아닌 사람이 있겠소. 모두 당원이지요. 그리고 실로 나는 별로 한 것이 없는데 당원이 된다면 천하 사람의 웃음을 살 것이도. 뿐만 아니라 여성 동무까지 의심을 받을 것이며, 여러 당원들의 질투심을 일으키게 될 것이며 여성 동무가 추천하여
35. 당원이 된다면 당원들이 가치가 없는 것이요. 비록 나는 떨어져 있지만 사상만은 염려하지 마시오. 그는 이 말을 듣고 손뼉을 치면서 날을듯이 좋아하며 " 우리 스님 동무는